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난의 변 (문단 편집) === 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붕어와 혜종 건문제 주윤문의 즉위 === ||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Hongwu1.jpg|width=300]]|| || '''[[명나라|명]] [[홍무제|태조 홍무제 주원장]]''' (明 太祖 洪武帝 朱元璋) || 한때는 [[유민]], [[거지]], [[고아]]의 신세였던 명나라의 시조 주원장은, [[곽자흥]](郭子興)의 수하가 된 후 뛰어난 능력을 살려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. 그리하여 1355년, 곽자흥이 사망하고 그 세력을 이어받은 주원장은 자신의 근거지를 장강 이남으로 옮겨 현 남경인 집경(集慶)을 손아귀에 집어넣고 일약 강력한 군웅으로 떠오르는 데 성공했다. 그 후 최대의 적인 서계홍건군의 수장 [[진우량]](陳友諒)을 [[파양호 대전]](鄱陽湖大戰)에서 대패시키고, 휘하의 [[명장]] [[서달]](徐達) 등이 활약하여 [[장사성]](張士誠)을 격파함으로써 전중국 최강자로서의 면모를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. 이후, 서달과 [[상우춘]](常遇春)이 북벌하여 [[원나라]]의 남은 잔당을 중국 내에서 깡그리 일소함으로써, 유일무이한 전중국 통일제국으로서 명나라의 판도를 확실하게 굳히는 데 성공했다. 이후 주원장은 1380년 [[호유용]](胡惟庸) 일파를 소탕한 일을 시작으로, 1393년 [[남옥의 옥]](藍玉─獄) 사건 때 수많은 공신을 학살함으로서 후대에 대한 불안을 지우려고 했다.('''호람의 옥''') 당시 주원장에게는 26명의 황자(皇子)가 있었는데, 그 가운데 정실인 [[마황후]](馬皇后) 출신의 자식은 모두 5명이었다. 황태자는 장남이었던 의문태자(懿文太子) [[주표]](朱標)였지만, 1392년 주표는 주원장보다 먼저 죽고 말았다. 장남이 죽고 난 후 다른 황자들 중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단연 4남이었던 '''연왕 주체'''였다. 당시 주원장은 황자들에게 각각 수천 명에서 수만 명의 병력을 주고 각지의 왕으로 봉해 대명제국의 울타리, 즉 번병(藩屛)으로 삼고 있었는데, 명나라에 있어 저주스러운 상대인 [[몽골]]은 아직 막북(漠北)에 건재한 상태였고, 주체가 다스리는 지역인 [[북평]]의 [[연나라]] 지역은 바로 그 몽골을 막는 가장 앞선 울타리나 다름 없었다. 이 사실만 보아도 주체에 대한 평가나 대우가 어찌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. 따라서 황태자 주표가 죽은 후, 새로운 황태자를 책봉하는데 있어 연왕 주체의 이름이 대두되었다. 그러나, 학사 [[유삼오]](劉三吾)가 >'''"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잇는 게 맞습니다."''' 라며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표시했고, 이에 홍무제는 주체를 태자로 삼는 일을 그만두었다.[* 차남인 [[서안]]의 진(秦)왕 주상, 3남인 [[태원]]의 진(晉)왕 주강의 반발을 염려하기도 했다.][* 아무래도 주체는 후에 영락제가 되다 보니, 사료를 남기는 입장이라 위와 같은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의심이 있다. 또, 아예 영락제가 사실은 마황후의 아들이 아니라 고려 출신 공녀인 공비의 아들이라는 설도 보인다.] 결국 새로 황태손이 되고, 이후 황제가 된 인물은 주원장의 손자였던 주윤문(建文帝), 곧 '''[[건문제]]'''였다.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